2005(단기 4338). 6. 5. 13
국립국어원, 서로 손잡기에는 때가 이르다
김 영환
부경대 교수, 철학
kyh@pknu.ac.kr
국립국어연구원이 지난해 11월에 국립국어
원으로 개편되었다. 사실 국어연구원을 없애
야 한다는 여론이 오래 전부터 있어 온 것을
생각한다면, 이런 개편도 뜻밖의 일이다. 이
개편으로 국어원은 그냥 연구 기관에 그치지
않고 정책 기능까지 맡게 됨으로써 더 큰 힘을
갖게 되었고, 원장은 차관급으로 격이 올라갔
다. 지난 1984년에 이 희승 학맥이 학술원 산
하에서 임의 기구로 출발시킨 국어연구원이
앞으로 또 어떻게 변신을 거듭할 것인지, 많은
사람의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다.
이 기관이 지나온 길을 볼 때 걱정되는 바가
적지 않다. 이 기관은 일본의 국어연구소를 본
받아 이 희승이 평소에 세우자고 주장해 온 것
이었다. 이 희승은 일본의 말글살이를 우리의
모범으로 생각한 사람이었다. 국립국어원은 이
희승의 오랜 주장인 한자 혼용론을 지지해 왔
다. 남북의 통일을 대비한 ‘종합 국어 대사전’
을 만든다고 큰소리치더니, 한자말과 홀이름씨
투성이의 이 희승식 사전을 다시 만들고는 ‘표
준 국어 대사전’이라 속이고 있다. 지난 1994
년에는 이 희승을 ‘시월의 문화 인물’로 추천하
여 한바탕 소동을 빚었다. 1999년 2월에는 한
자 병용 정책을 뒷받침하여 말썽을 빚었다. 이
기관의 원장은 이 희승의 제자들이거나 그들이
내세운 사람이다.
이런 국립국어원이 국어기본법 시행령 마련
을 위한 이야기 마당을 한글 문화단체 모두모
임과 함께 지난 4월 30일에 열었고, 6월 2일
에는 국어 기본법의 주요 내용 가운데 하나인
국어 상담소 운영에 관해 한글 학회와 함께 공
개 토론회를 열었다고 한다. 국어원이 돌아가
는 속내를 지켜보는 글쓴이에게 이런 소식은
정말 뜻밖이다.
이 희승의 ‘과학적’ 국어학을 잇는 국어원은
우리 말글 살리기 운동의 훼방꾼이었다. 식민
지 교육 기관인 경성제대의 권위로 주 시경과
조선어 학회의 전통과 맞서 왔다. 이 대결에서
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불리해진 그들은 드
디어 권력의 도움을 얻기 위하여 국립 국어연
구원을 만들었다. 광복 뒤에도 청산하지 못한
식민지 찌꺼기인 제국 대학 체질이 다시 나타
난 것이다. 국가 기관인 국어원에 이 희승 그
림자는 아직도 짙게 드리우고 있다.
“우리나라의 어문 정책에 필요한 자료를 과
학적․체계적으로 조사, 연구하여 어문 정책
의 기반을 조성한다.”는 국어원의 설립 목적
(2005. 1.)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. 이 말
은 1938년에 나온 ｢조선어학의 방법론 서설｣
에서 이 희승이 하던 말을 살짝 바꾼 것이다.
“대개 과학적 연구란 것은 개개의 사실을 조사
음미하는 것으로부터 전체에 대한 완전한 체계적
지식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. …… 언어의
연구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나아가서 그 최고 이
론이라든지 근본 원리를 세우고, 이 원리를 기본
으로 하여 종합적으로 전체의 체계를 조직하지
않으면 안 되리라 생각한다.”
이런 생각을 말글 정책에 적용한다면 귀납
적 방법에 따른 조사가 어느 정책이 옳은가를
보여 주리라고 여기게 될 것이다. 남 기심 원
장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
다.
“한글 전용과 한자 혼용의 양쪽 주장이 논리적
이 아니고 직관에 의한 것뿐이라서 옳고 그름을
가릴 수가 없다. 실증적 자료와 실험적 증거로
보완하라.”(한국 어문교육 연구회 주최, “한자 교육
14 한글 새소식 394
과 한자 정책에 대한 국제 학술 회의”, 2004. 9.
11.)
말글 정책을 결정할 실증적 자료와 실험적
증거가 모자란다는 것이다. 그러나 이런 것은
틀린 생각이다. 과학적 방법이 무엇이냐를 잘
못 안 데서 나온 것이다. 실증적 자료와 실험
적 증거를 아무리 모아 보았자, 한글 전용이냐
한자 혼용이냐에 대한 답을 얻을 수는 없다.
과학에서 가설을 생각해 내는 것은 감정과 지
성, 무의식적 직관이 어우러져야 한다. 자료와
증거만 있으면 옳은 가설 즉 정책(결론)이 저
절로 나오는 것처럼 아는 것은 소박한 생각이
다.
어떤 정책(가설)을 세우느냐에 따라 실증적
자료는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. 개개의 사
실을 조사 음미함으로써만 전체에 대한 체계
적 지식에 이를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잘못이
다. 주어진 사실을 넘어가는 가치 판단과 앞날
의 여러 가능성에 대한 고려가 들어간다. 아무
리 많은 증거가 있더라도 세울 수 있는 정책이
저절로 나오지는 않는다. 정책이란 현실을 바
탕으로 바람직한 앞날을 그리면서 삶을 짜 나
가는 일이다. 그러므로 정책을 세우는 데는 현
실을 뛰어넘는 부분이 끼어들 수밖에 없다. 실
증적 자료와 실험적 증거가 더 필요한 것이 아
니다. 귀납법에 대한 소박한 믿음은 논리적 오
류에 지나지 않는다. 필요한 것은 우리 말글의
역사적 현실과 그 앞날에 대한 올바른 깨우침
과 정책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다.
우리의 말글 정책이 겨레 문화를 과거의 인
습에 길들이는 것이 되지 않게 하려면 우리의
역사적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이해가 반드시 들
어가야 한다. 지난날 유교 사상과 한문 숭배에
따른 폐단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우리 말글 사
랑은 몇몇 사람의 옹고집으로 보일 수밖에 없
다.
아직도 많은 연구자들이 유학의 성격에 대
한 이해도 없이 한글 사랑이 민족주의적 감정
에서 나온 것이라고 여긴다. 이 희승도 “한글
전용은 민족적 감정에서 흘러나온 집념”(ꡔ어문
연구ꡕ 4권, ‘권두언’, 1974)이라고 말하고 있다.
다음과 같은 이 희승의 말은 그가 우리 말글
의식을 규정한 유학에 대해 얼마나 소박한 생
각을 갖고 있었는가를 말해 준다.
“그들은 가명인(假明人)이 아니었다. 우리나라
를 소중화로 만든 것은 어쭙지않은 관료들의 죄
요 그들의 허물이 아니었다.”(｢딸깍발이｣, ꡔ협동ꡕ
37호, 1952)
사대부와 선비를 이렇게 분리해 생각해도
좋은가? 유학에서 사대주의는 우연적인 것인
가? 선비는 과거에 합격하여 관료로 진출하는
꿈을 가진 예비 관료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
다. 경제적인 활동과 거리를 두어야 했던 그들
이 국가나 관료와 구별되는 근대 시민의 자율
적인 영역을 열었다고 볼 수는 없다. 그에게는
유학에 따른 동아시아의 조공-책봉 체제나 중
화 사상에 대해 기본적인 이해마저 없었다. 중
국의 정치적 혼란기에 태어난 사상으로서 유
가 사상은 통일과 질서를 강하게 지향한다. 유
학이 마지막으로 이르는 곳인 ‘평천하’는 곧 중
화 패권에 따른 질서(pax sinica)를 뜻한다.
‘과학적’ 조선어학은 중화주의에는 눈을 뜨
지 못한 채 이에 대항하는 겨레의 몸부림을 ‘과
학적’이지 못하고 이데올로기요 감정일 뿐이라
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. 여기서 ‘과학적’ 국어
학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은 선명하게 드러나고
있다. 이는 우리 역사에 대한 무관심과 망각을
불렀다. 언어와 역사 및 문화를 떼어놓음으로
써 우리말 연구의 탈역사화를 불러 왔다.
우리의 말글 정책을 세우는 데는 유학을 이
해하는 것이 필요하다. 말글 의식이 대부분 유
학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. 말글을 도구
로 보는 경향이 강하고 말하기보다 글쓰기를
높이 치는 것도 과거 제도에서 비롯된 유학의
영향이다. ‘한자는 조어력이 강하다’는 한자 혼
용론의 주장에서도 말보다 글자를 중시하는
말글 의식이 두드러진다. 이는 우리가 중국 문
화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음을 보여 준다.
유럽의 소리 중심주의 전통은 이런 중국 문
화의 전통과 크게 차이가 난다. 유교 경전의
매개체인 한자는 중국이 하나임을 상징하는
글자이다. 통일된 한자가 없었다면 중국도 유
럽처럼 분열되었을 것이다. 한자가 없이는 유
학이 목표로 하는바, 수많은 방언으로 갈라진
제국의 통일을 이루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며,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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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민족에 대한 한족의 패권 확립도 가능하지
않았을 것이다. 라이프니쯔가 중국의 한자를
예찬했던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. 30년
전쟁의 폐허 속에서 유럽의 평화와 통일을 염
원했던 그에게 동아시아 전체가 쓰는 한문은
이상적인 ‘보편 문자’로 보였다. 한자는 통일
제국의 빼놓을 수 없는 표준 코드였다. 그것이
낱소리글자와 같은 추상적인 부호가 아니라
구체적 내용을 담은 이미지로서 중국의 역사
와 문화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도 단순히 중립
적인 전달 매체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. 중화
사상을 떠받치는 기둥이다.
지난날 유교 사상과 한문 숭배에 따른 폐단
을 제대로 아는 것은 우리 지성사에서 매우 값
진 깨달음이다. 우리 유학 사상사에서 조선의
공자는 없고 공자의 조선만 있었던 큰 이유는
한문 숭배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. 중국글로 생
각하고 표현하자니 생각이 주체적이 되기 힘
들었다. 쉬운 한글은 애써 외면하고, 수십 년
동안 훈련을 거쳐야 쓸 수 있는 한문만을 쓰니
그런 사상을 이해할 독자들도 몇몇 사람에 제
한될 수밖에 없었다. 일본에 견주어 조선의 유
학은 훨씬 추상적이고 고답적인 형이상학에
오랫동안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다. 한자 문
화에 억눌린 한글 문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
아 나서야 할 때이다.
경성제대와 이 희승의 유산을 버리지 못한
국어원은, 새말은 창조되는 것이라기보다 탄생
하는 것이라는 언어의 자연 발생설을 내세웠
다. “날틀, 먹거리, 묻지마 투자, 야타족, 먹자
판” 같은 낱말이 말 만드는 법에 어긋나 자연스
럽지 못하다는 것이다(국립국어연구원, ꡔ2001
신어ꡕ).
과학적 연구를 내세우던 사람들이 새로 돋아
나는 우리말에 대해서는 왜 섣부른 가치 판단
을 내리는가.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뜻을 나타
내는 새말도 많이 생기도록 돕는 게 일의 순서
이다. 이런 자연 발생설은 언어에 대한 자유방
임주의로서 이것은 외국어가 거침없이 들어올
수 있도록 둑을 허무는 것이었다. 무엇보다도
이런 주장은 국어원이 국가 기관으로서 있어야
할 이유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다.
이런 측면을 생각할 때, 국어원의 뜻밖의 태
도 변화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. 참여 정부
의 성격을 생각할 때, 국어원은 없어져야 할
기관이다. 그러나 그 조직과 권한을 확대하다
보니 정부의 규제가 늘어난다는 느낌을 주게
되었다. 이런 법률의 시행이 오늘날 민간 부문
의 자율을 강조하는 미국식 신자유주의 쪽의
저항에 부딪힌 것이다.
정부 안에서도 이 법안에 그다지 우호적인
것 같지 않다. 얼마 전에는 일본마저도 “국어”
란 말을 쓰지 않기로 한 것에서 보듯이, 국가
주의적 색채가 물씬 나는 “국어”란 말을 쓸 시
한도 그리 많이 남아 있지는 않을 것이다. 국
립국어원이 민간 단체와 손잡을 필요가 생긴
것이다. 지난 4월 30일에 있었던 공청회에서
국어원의 어느 부장이 한 말에서 그런 사정을
엿볼 수 있다.
“규제 문제는 규제개혁위원회를 넘어서 통과
시키는 것이 문제이다. 국립국어원과 민간 단체
가 손잡고 같이 일을 해 나가길 바란다.”
바깥바람이 조금만 다르게 불면 또 다시 국
어원은 훼방꾼으로 휙 바뀔지도 모른다. 국립
국어원이 민간 단체한테서 우리말 훼방꾼으로
이름이 오르내린 게 이미 여러 번이다. 믿을
수 있는 국가 기관이 되기 위해서 이제까지 국
어 연구원의 되풀이된 속임수에 대한 공개 사
과가 앞서야 한다.
아울러 정부의 다른 기관에서 하는 일, 이를
테면 경제 특구에서의 사실상의 영어 공용화
를 국어원이 앞장서서 막겠다고 선언해야 한
다. 우리말을 위기로 모는 온갖 제도를 없애
나가겠다고 선언해야 한다.
한자 중심의 낡은 말글 의식과 미국말 숭배
가 더불어 있는 현실에, 법부터 들이대면 우리
말글 지키는 운동을 부당한 간섭이라 여기는
사람만 늘어날 것이다. 식민지 찌꺼기를 청산
하지 못한 국립국어원과 섣불리 손잡기는 아
직 이르다. 민간 자율 운동으로서 순수성만 의
심받게 되어 자랑스러운 독립 운동의 전통에
흠집을 낼 가능성이 크다. ꔀ